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에발트 폰 클라이스트 (문단 편집) === 해임과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 === 만슈타인이 [[제3차 하르코프 공방전]]을 대승으로 이끔에 따라 A집단군은 더욱 안정화되었다. 히틀러는 A집단군에게 [[크림 반도]] 수비와 위수를 맡겼다. 클라이스트의 A집단군은 남부집단군의 우측방을 엄호하면서 흑해 연안을 통한 소련군의 우크라이나 진격로를 차단하며 만슈타인의 작전에 큰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쿠르스크 전투]]에서 독일이 패배하고 류먄체프 작전으로 시작된 소련군의 하계 공세로 만슈타인이 밀려나기 시작하자 A집단군으로 들어오는 압박 또한 거세지기 시작했다. 결국 44년 동계 공세로 만슈타인의 남부집단군이 우크라이나에서 축출당하자 A집단군은 직접적인 위협에 노출되었다. 44년 3월에 소련군은 케르치 반도 상륙 작전을 전개하며 A집단군에 대한 대공세를 시작했다. 클라이스트는 만슈타인과 함께 남부집단군과 A집단군을 각각 우크라이나와 크림에서 후퇴하면서 전선을 재정비할 것을 히틀러에게 요청했다. 그러나 후퇴 소리에 이성을 잃어버린 히틀러는 클라이스트와 만슈타인에게 백엽 검 기사 철십자 훈장을 수여한 뒤 동시에 해임했다.[* 만슈타인과 클라이스트가 해임된 이후 남부집단군은 북우크라이나 집단군으로, A집단군은 남우크라이나 집단군으로 명칭이 변경되었으며 각각 히틀러의 신임이 두터운 [[발터 모델]] 원수와 [[페르디난트 쇠르너]] 상급대장이 임명되었다.] 이후 클라이스트는 현역에 복귀할 수 없었다. 1944년 7월 20일의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 당시 그의 가문 사람인 에발트 폰 클라이스트-슈멘친이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에 연루된 탓에 연좌죄로 클라이스트 원수도 게슈타포에 연행되었다.[* 동 시대에 '에발트'란 이름의 클라이스트가 세 명이나 있어서 헷갈리기 쉽다.][* 이때 많이 연좌죄로 게슈타포에게 연행되었는데, [[에리히 펠기벨]]의 가족도 연좌죄로 연행되었다.] '''클라이스트 원수도 에발트 폰 클라이스트-슈멘친이 반 나치 인사로서 암살자 그룹의 일원임을 알고 있었지만, 이에 동참하지도 않았고 고발하지도 않았다.''' 클라이스트도 방조 혐의로 처벌 받을 수 있는 사안이었지만 이미 [[에르빈 폰 비츨레벤]] 원수의 처형이 있은 직후여서 나치는 클라이스트까지 사형시켰을 때 벌어질 반발을 우려하였고 클라이스트는 풀려날 수 있었다. 에발트 폰 클라이스트-슈멘친은 종전 한 달도 채 남기지 않고 1945년 4월 9일 사형에 처해졌고, 그의 아들로 직접 히틀러 암살을 실행에 옮기기도 했던 에발트-하인리히는 포로수용소에 갇힌 채 종전을 맞이하였다.[* 에발트-하인리히는 명망 높은 저술가이자 정치가로서 2차 대전, 냉전, 냉전 이후 평화의 시대와 21세기를 모두 경험하였고 2013년에 세상을 떠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